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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0. 20世 〉31. <부정공>미서공휘인호묘갈명(嵋西公諱仁浩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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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부정공>미서공휘인호행장략(嵋西公諱仁浩行狀略)
嵋西公諱仁浩行狀略 公諱仁浩字亨瑞嵋西其自號也趙氏貫玉川顯于麗朝大將軍諱璋鼻祖簪組相襲至諱瑜典農副正入本朝守罔僕義至諱崇文 端宗朝與六臣同禍 贈兵曹諡節愍爲十四世顯祖自是不揚於位世以文行趾美高祖諱成望曾祖諱頤夏祖諱基彦考諱鎭和以壽通政大夫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外祖咸豊李璣憲辛丑十一月三日擧公于五山里第幼不好弄有根天之孝家甚寒儉而凡志體之養莫下殫誠竭力庋閣常餘視饍藥餌灑掃房闥不委家人早貫經史道理性命靡不講海至於程文素不屑然有庭命故隨例赴場屋竟不利五十七歲丁酉丁外艱六十三歲癸卯丁內艱哀毀踰制不以衰老少懈食必用瓦器口不近珍味家人憂其不勝喪制輒曰吾行吾志皆勿慮焉闋制後過忌辰祭饌必躬檢務致精潔値墓在於里後晨夕展掃鷄犬至今不得亂穢人稱以爲異事與族兄石淵德浩契分最密文場詩讌聯翩徃來翛然有長德風人多敬重焉後進來學者提掖敎諭各充其材敎子訓孫必義方常曰人不學無以立雖貧寠勿廢也未嘗以謔語狎人不以屢空易操歲丁巳以疾考終十月九日也享年七十七葬于谷城竹谷面山水洞子原從先兆也配咸安趙氏仁植女有二男四女男秉龍秉鳳女適河東鄭方鉉淸州韓一榮金海金秀悔南原尹亨燮長房孫洪燮順燮出爲秉鳳后秉龍以余爲先友托以狀行之文竊惟四十年舊要也誼不敢辭略叙梗槩如右以俟知德者考焉 濟州 梁相洙 撰 미서공휘인호행장략(嵋西公諱仁浩行狀略) 공의 휘는 인호(仁浩) 자(字)는 형서(亨瑞) 미서(嵋西)는 그의 호(號)이다。 옥천 조씨(玉川趙氏)인데 고려조(高麗朝) 대장군 휘 장(璋)이 시조(始祖)로 그뒤 대대로 벼슬을 해왔다。 유(瑜)는 전농부정(典農副正)으로 본조(本朝)에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 하였으며 숭문(崇文)은 단종조(端宗朝)에 육신(六臣)과 같이 화(禍)를 당하여 증직(贈職)은 병조판서(兵曹判書) 시호(諡號)는 절민(節愍)이었는데 공의 十四세조(世祖)이다。 그 뒤로는 벼슬에 나타난 사람이 없고 다만 문행미적(文行美蹟)만 우수한 분들이었다。 공의 고조는 성망(成望)、 증조는 이하(頤夏) 조는 기언(基彦)、 고는 진화(鎭和) 였는데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절충장군(通政大夫折衝將軍) 행(行) 용양휘부호군(龍驤衛副護軍)이었으며 외조부(外祖父)는 함풍(咸皇) 이 기헌(李璣憲)이었는데、 신축(辛丑) 十一월 三일 오산리(五山里) 본가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유희(遊戯)를 좋아 하지 않았으며 하늘에 뿌리를 내린 효도가 있어 집이 몹시 가난했는데도 부모의 지체(志體) 봉양에 정성과 힘을 다하여 찬장에 언제나 반찬이 남아 있었고 약(藥) 보살피는 일과 집안청소 하는 일을 남에게 맡기지 않았다。 공은 또 일찍부터 경전(經傳)과 사기(史記)를 관통(貫通)하였고 도리(道理)와 성명(性命)에 관해서도 조예가 있었다。 과문(科文) 공부에 대해서는 본래 중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친명(親命)이 있어 과거장에 나가긴 했지만 끝내 이롭게 되지 않았다。 공은 五十七세 되던 정유(丁酉)년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六十三세 되던 계묘(癸卯)년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지나치게 슬퍼하여 노쇠(老衰)하다 하여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나 음식을 먹을 때는 질그릇을 쓰고 입에는 진미(珍味)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집안 식구가 몸이 상하여 상제(喪制)를 견디어 내지 못할까 걱정을 하면 공은 문득、 『내 뜻을 내가 행하는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 라고 하였다。 탈상후 제사날이 돌아오면 제찬(祭饌)을 몸소 점검하여 반드시 정결(精潔)하게 하였고 묘소가 마을 뒤에 있기 때문에 아침 저녁으로 가서 살피고 청소하곤 했는데 개와 닭이 지금껏 그곳에 들어가 더럽히지 않으니 사람들이 이상한 일이라 하였다。 공은 또 족형(族兄) 석연(石淵) 덕호(德浩)와 세 분이 가장 친밀하여 글짓고 시(詩) 읊는 잔치에 언제나 함께 왕래하니 장덕(長德)한 기풍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경중(敬重)히 여겼다。 또 찾아와 배움을 청하는 후학들을 잘 가르쳐 각각 그 재주에 알맞게 해 주고 자손을 가르칠 때도 의방(義方)으로 하며 언제나 말하기를、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어느 위치에 서야 할지를 모르는 것이니 아무리 가난해도 배움을 폐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일찌기 희롱하는 말로 남을 침압하지 않았고 가난함으로 하여 지조를 바꾼 적이 없었다。 정사년에 병환으로 세상을 뜨니 그날이 十월 九일이었고 나이는 七十七세였다。 곡성(谷城) 죽곡면(竹谷面) 산수동(山水洞) 자원(子原)에 장사를 지내니 이는 선조 묘가 그 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부인은 함안조씨(咸安趙氏) 인식(仁植)의 딸로 二남 四녀를 두었다。 남(男)은 병룡(秉龍)·병봉(秉鳳)이며 딸은 하동(河東) 정 방현(鄭方鉉) 청주(清州) 한 일영(韓一榮) 김해(金海) 김 수회(金秀悔) 남원(南原) 윤 형섭(尹亨燮)에게 출가했다。 장방(長房) 손자는 홍섭(洪燮)·순섭(順燮)인데 순섭(順燮)은 병봉(秉鳳)의 후가 되었다。 병룡(秉龍)이 나를 벗이라 하여 나에게 행장(行狀)을 부탁한다。 생각해보니 그와는 四十년 옛 친구이므로 사양할수가 없어 대강 줄거리를 위와 같이 적어 지덕자(知德者)의 참고가 되기를 바란다。 濟州 梁相洙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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